하성이는 태어날 때 머리 모양이 조금 짱구였다.
옛날에야 짱구라고 하고 그냥 지나갔겠지만
지금은 얼마나 짱구인지, 혹시 두개골의 봉합선이 너무 일찍 닫히는 증세는 없는지 검사도 했다.
혹시라도 그렇다면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다니 보통 큰일이 아니다.
다행히 대천문 소천문 잘 열려있다고 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개월수가 늘어가면서 머리 모양도 조금씩 동그래지는 것 같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생명이 자라나는 일이 참 신비롭다.
며칠 전에는 150일이 지났다고 150일 달력을 옆에 두고 사진을 찍었다.
이제는 달력도 쳐다본다.
새로운 것을 인식하는 단계인가 보다.
하성이 아빠는 출근하기 전에 하성이를 데리고동네 한 바퀴를 돈다.
처음에는 막연히 하늘, 나무와 꽃들을 바라보는가 싶은 표정이었는데
이제는 지나가는 차도 보고 하나하나 신기한 사물들을 뚫어지게 보는 것 같다.
마치 눈을 처음 떠본 사람이 세상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하성이를 키우면서 하성이 아빠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한다.
사람은 왜 이렇게 오랜 시간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만 독립된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졌을까
생각해 보면 어린아이는 부모의 돌봄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보는 것과 듣는 것, 사람을 알아보는 것까지 하나씩 배워야 하고, 혼자 먹고 걷고 말하고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하성이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문득 나도 그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누군가가 먹여 주고 안아 주고 재워 주었기 때문에 지금 여기까지 살아왔다.
부모의 부모는 조부모이고 그 조부모에게도 부모가 있다.
그렇게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문득 생명이라는 것의 처음을 생각하게 된다.
세상을 만드신 이가 있고, 세상을 만드신 이의 사랑에 우리의 삶이 의존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햇빛과 자연과 공기는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의식의 저 지평선 끝자락까지 걸어가다 보면 그 모든 것을 주신 분이 누구인가를 묻게 된다.
그분의 이름 가운데 하나는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부모와 자식으로 만나 사랑하는 것을 조금씩 배워가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고, 때로는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언제가 우리의 삶을 다 살아낸 뒤에는
얼마나 사랑하였는가.
그것으로 한 사람의 생애가 기록될지도 모르겠다.

'창밖의 자서전 > 하성이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아픔이 지나간 자리 (0) | 2026.07.24 |
|---|---|
| 뒤집기 하고 싶은 하성이 (0) | 2026.07.14 |
| 하성이 이야기 (0) | 2026.07.08 |